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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가 된 돌죽의 세계 | 돌죽문학) 번외편 : 현대 사회가 된 돌죽의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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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쓰는유동 작성일19-07-08 09:56 조회1,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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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27편) : 구 도심의 폐허에서 천재 발동술사로 여겨지는 '마법봉 깎는 노인'을 만나러 간 제 1 철거반의 미노광(트로그의 미노타우로스, 28세)과 조양호(엘리벨론의 딥 드워프, 38세)는 마법봉 깎는 노인을 추적하지만 놓치고 만다. 트로그의 손길을 빌어 마비의 마법봉을 견뎌낸 노광을 상대로 공간이동 마법봉을 발동해 도망친 마법봉 깎는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던 양호는, 노광에게 공간이동 마법봉은 제조법이 실전된 것이라며 의아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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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 영웅이 조트의 오브로 세상에 질서를 불러오기 전부터, 해가 바뀌는 시기는 축제의 시기였다. 그리고 명절이란 것이 으레 그렇듯, 참견과 잔소리의 시기이기도 했다. 질서가 찾아오고 도시가 세워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새해를 기념하는 전통-그리고 그에 뒤따른 잔소리는 오늘날에도 명맥을 잇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한창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던 트로그의 미노타우로스, 노광은 오랜만에 고향집 문턱을 넘으며 외쳤다. 한때 전도유망한 육상선수였으나 트로그 신도의 버릇을 못 이긴 탓에 제명당한 그는, 올해로 스물 하고도 일곱 살이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노광은 그럼 그렇지 하며 논으로 향했다. 


 노광의 고향은 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평야에 자리한 농촌이었다. 강 위에 사는 스프리건들이나, 한때 광산 마을이었던 산기슭의 가고일과 딥 드워프들을 제외하면 미노타우로스가 가장 많은 동네였다. 미노타우로스가 대충 4할 정도를 차지하는 이 고즈넉한 농촌에서 노광의 부모님은 다른 많은 이웃들처럼 농사를 지었다. 옆집 사는 달수네는 젖소를 키웠다. 윗집 사는 송유 형님네는 노광의 사촌뻘 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마을에서 이름난 술꾼들인 덕인지 사교성이 좋아 대대로 이장 노릇을 하는 집이었다. 아랫집 사는 방유 선생은 보건소 의사였는데, 그나마 가장 학력이 높은 미노타우로스였다. 


 노광은 위로 형이 셋 누나가 셋인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건실한 농부였고, 큰형도 마찬가지로 심성 순한 농부였다. 둘째형은 어렸을 적부터 보건소의 방유 선생과 친해져, 엘리벨론의 신도가 된 뒤 보건소 도우미로 근무중이었다.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나란히 구청 공무원이 되었고, 그중 큰누나는 결혼 생각이 없다며 엄포를 놓은 탓에 어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리기 일쑤였다(아마, 그래서 오늘도 가장 늦게 오지 않을까 싶었다). 작은누나는 구청에서 만난 힐오크 청년과 결혼한지 올해로 2년째였다(이쪽은 또 다른 방면으로 잔소리에 시달릴 예정이었다). 휴학을 자주 하던 막내누나는 경영학과 졸업을 앞두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갔는데, 고자그 신도가 어디 안 간다고 워킹 홀리데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럴 돈을 매번 버는 수완이 신기한 양반이었다.


논으로 가는 길에 노광은 도랑 너머 개구멍을 바라보았다. 셋째형은 정말, 정말 장난기가 많은 작자였는데, 노광을 개구멍으로 들여보낸 뒤 흙더미를 부어 구멍을 막아버리곤 했다. 소 키우는 달수가 분노의 나방을 잡아와 사마귀나 깡총거미 따위를 싸움붙이고 있을 땐, 가만히 지켜보다가 순식간에 나방을 잡아채고선 그 길로 내달려 달수네 집 축사에 던져넣기도 했다-그때 소들이 어디 그냥 좀 난리를 쳤나. 달수네 부모님과 노광의 부모님 모두 모나지 않고 순한 성격인 덕에 잘 마무리되었지만.



"오, 벌써 왔어?"


한창 눈을 털어내던 큰형, 노궁이 노광을 맞이해주었다. 그는 처음 보는 비닐하우스 앞에서 뿔에 하얀 눈송이를 잔뜩 묻힌 채 였다.


"오다 보니까 오랜만에 좀 달리고 싶어져서. 버스에서 일찍 내리고 좀 뛰었더니 벌써 와버렸네."

"아."


노궁은 잠시 그 큼지막한 눈망울을 껌뻑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랑 아빠는?"

"아빤 마을회관에 잠깐 일 있다고 가셨어. 뭐 새해 약주라도 따시려는 거 겠지. 엄만 동생들 데리고 장 보러 가셨고."

"엄마 드시라고 칼슘 보충제 좀 사왔는데. 요즘 뼈는 좀 괜찮으시대?"

"응. 노융이가 저번에 아는 분한테 왕진 부탁드렸거든. 처음엔 골다공증인 것 같대서 걱정했는데, 약 계속 드시니까 지금은 괜찮으셔. 평의련 사람들 친절하고 좋더라."

"평의련? 평등한의료복지연대?"


노광의 둘째형 노융은 꽤 독실한 엘리벨론 신자였는데, 그 탓인지 평등한의료복지연대나 대리석당 의원들 등 정치 쪽에 가까운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다른 가족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도시에서 취업 준비에 매진하던 노광은 엘리벨론 신도 특유의 이상주의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 아주 자주 봐온 터였다.


"그 사람들 요즘 힘이 많이 빠졌던데. 대리석당도 계속 삽질만 하고."

"아무래도 그 테러 여파가 컸겠지. 우리한텐 봉사 차원에서 싼값에 왕진까지 와주는 착한 사람들이지만."


노궁이 고개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다 뭐야? 아빠가 비닐하우스에 흥미가 있을 분은 아닌데."

"아, 이거?"


노궁이 눈 터는 용으로 쓰던 빗자루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년 말에 발동술사 하나가 마을에 들렀거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아주 중무장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자초지종은 이랬다: 지나가던 발동술사 하나가 급하게 민박을 찾았는데, 마스크랑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춘 것이 영 수상해 보여서 다들 받아주길 꺼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노광네 부모님이 마침 약주를 즐긴 참이었고... 마침 노광의 방이 비어있기도 해서 하룻밤 재워줬다고 한다. 다음 날, 발동술사는 감사의 표시로 가방에서 이것저것 부품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비닐하우스 하나를 만들고 제어기까지 달아놓고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게 뭔 침묵귀신이 비명 지르는 소리여?"


노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 덮힌 비닐하우스를 올려다보자 노궁은 뭔 대수라는 얼굴로 마저 눈을 털었다.


"우리야 발동술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강 건너 풀동네 사람 모셔와서 여쭤보긴 했어. 엄청 수준급으로 지은 거라더라."

"허."


물론 도시에 사는 발동술사들이 별별 신기한 걸 다 만들어낸다지만 하룻아침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낸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시제품 세일즈맨이 재고라도 두고 간 건가?


"뭐...제대로 작동한다니 다행이네."

"아. 근데 폭설엔 얘도 뻗더라. 그러니까 눈 터는 좀 도와줄래?"


눈을 털어낸 비닐하우스의 모습은 조금 작기는 해도 있을 건 다 있는, 실속 있는 구조였다. 최소한의 자재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려는 시도였는지 독특한 모양으로 구부림 철사들이 눈에 띄었다. 노궁이 서리가 엉겨붙은 문을 두어번 흔들자,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예상밖의 온기가 흘러나왔다. 레일마저 얼어붙은 한파에도 비닐하우스 안의 딸기들은 파릇파릇함을 잃지 않았다.


"제대로 짓기는 했나 보네. 근데 아빠가 딸기도 키우셨나?"

"아빠 말고 엄마가 심어보자 하셨어. 솔직히 아빤 요즘 매사에 관심 없으시잖아. 엄마나 새로운 걸 해볼 여력이 되시지."


노궁이 쪼그려 앉아 딸기들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노광은 쪼그려 앉은 그의 등을 보았다. 노광보다 넓지도, 근육이 튼실해지도 않았지만 노광 자신에겐 아직 없는 듬직한 구석이 있었다. 노광은 스스로의 처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그리고 또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는 가끔씩, 그마저도 피로에 쩔어 건성일 뿐이었다. 면접 준비도 이젠 의미가 없었다. 편의점에 쪼그려 앉아, 쓸데없이 커다랗기만 한 자기 덩치로는 앉을 때마다 골반이 욱신거리는 그 편의점 의자에 쪼그려 앉아, 투박한 손가락으로 돈을 세는 일. 노광은 살아남기 위해 그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었다.


 한숨을 쉬니 허연 김이 둥실둥실 흩어졌다. 문득, 노광은 눈 덮힌 산 중턱 어딘가에 눈길이 갔다. 한때 노광은 즐거이 산을 올랐다. 제 또래치곤 드문 취미였다. 있는 힘껏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으로 느껴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숙명은 고삐에 매인 누렁소가 아니요, 그 혈통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힘을 키우고 굳건히 또 과감히 나아가는 자의 것이었나니. 그것은 또한 트로그께서 보여주신 비전이기도 했다.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라, 오직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 너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분노하라-그리고 부수고, 다시 나아가라.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너로 하여금 피가 끓도록 하는 그 방향으로 힘이 다할 때까지 나아가라.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무엇인가. 눈 덮힌 시골에 쪼그려 앉아 딸기를 손보는 그의 큰형보다도 스스로에게 주어진 체력을 허투로 쓰고 있었으니- 운동선수를 꿈꾸며 키워 온 그 근육들은 그저 한낱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래서 설은 싫었다. 고향에 돌아오는 날은 싫었다. 자신이 꿈꾸던 흔적이 눈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이곳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자는 위화감만을 느꼈다. 여기선 스스로에 대한 분노마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무력감에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한낱 딸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녀왔습니다."


청소부 일을 하며 도시 생활을 이어가던 오카와루의 가고일, 상만은 오랜만에 고향집 문을 열며 말했다. 그의 할머니가 연로한 가고일 특유의 자갈 깨지는 소리, 그리고 따뜻한 미소와 함께 걸어나왔다.


"잘 갔다왔니?"

"예. 언제나처럼요. 할머닌 좀 괜찮으세요?"

"말도 마라. 하루하루 심심해서 골치아프단다."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상만의 부모님은 그가 한창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던 가운데 이혼했다. 근근이 버티던 광산업이 기어이 전멸하자 통장엔 잔고 없이 빚만 쌓여갔다. 한때 건실한 광부였던 상만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주폭을 일삼았고, 홍등가에 빠졌다. 견디다 못한 상만의 어머니는 이혼을 통보했고, 몇 차례의 보복 시도가 살인 미수로까지 이어진 후에야 그의 어머니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만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홧병인지 가정 폭력의 후유증인지, 상만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세상을 떠났다. 현대 사회에서 의외로 흔한 이 이야기의 끝은, 상만이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 되는 이 자애롭고 가끔은 짖궂은 가고일의 손에 거둬져 어머니 몫의 평온과 행복을 이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현대 사회가 으레 그렇듯이 물질의 빈곤은 정신의 풍요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길래 병원 좀 가시라니깐. 제 친구 형이 보건소에 계시는데..."

"어휴, 됐다. 이 나이에 더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자글자글한 실금이 가득한 할머니의 날개에 석고를 바르면서도, 상만은 속상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고일의 삶은 나이가 들면서 쌓인 실금을 따라 어느 날 산산히 부서져 돌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일상에서 생기는 생활 기스는 금방 메워지지만, 나이가 들면서 메워지는 데 한계가 생기고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하는 어느 날이 오는 것이다. 석고를 발라주는 건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콜라겐이나 항산화제를 먹는 것과 비슷하게, 노화를 늦추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늦추는 것이었다. 아주 조금만.


다만 도시에 사는 가고일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도시의 의사는 대부분 고자그의 신도이다. 엘리벨론의 신도가 수술이 주 업무인 정형외과나 응급실 등 남들이 꺼리는 분야에 포진해 있는 덕이었다. 엘리벨론과 관련된 일이 으레 그러하듯, 이는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 불시에 닥치는 사고는 훨씬 싼 가격에 치료받을 수 있으나 그 외에는 고자그의 황금그룹이 독점의 마수를 뻗는 걸 막지 못했다. 은빛당과 대리석당의 의견이 합치되는 몇 안되는 지점이 황금그룹의 지나친 독점 견제(은빛당에서 돌연변이 치료를 독점하는 것과 관련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일 정도로, 무수히 많은 수의 의사와 약사가 고자그의 신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았다-자연스레, 황금그룹 내부에서도 상호 경쟁이 활발해졌고 이는 훨씬 혁신적인 치료법과 신약 개발의 가속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도시 주민들은 매일 소량의 암브로시아™를 복용함으로써 육체적, 마법적 건강을 유지하거나 헤이스트™ 에너지 드링크로 피로를 회복하곤 한다. 큐어링™이 없었다면 도시는 지금쯤 온갖 기생충이나 식중독 따위로 진즉에 몰락했으리라.


하지만 당연히 그 풍요에는 돈이 따랐다. 그리고 상만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만한 돈은 커녕 변호사 선임과 법률자문을 구하느라 바닥나 지 오래였다. 법정싸움이 국선변호사라도 선임할 수 있지만 빈곤엔 근근이 먹고 살 만한 연금이 고작이었다. 그 연금을 가지고 상만을 키우는 건 한동안 할머니의 몫이었고, 이제 할머니의 부양이 상만의 몫이 되었다.


"아니면 저랑 같이 도시에서 지내시는 게 어때요? 그게 싫으시면 제가 여기로 돌아오거나요."

"그건 이미 다 끝난 얘기인걸로 안다."


상만의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러나 힘 주어 대답했다. 독립적인 성격 덕이기도 했지만 도시 생활은 평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할머니에게 너무 큰 부담이었고, 상만이 고향으로 돌아오자니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손자의 삶에 짐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상만에게 삶의 무게를 지우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겪은 괴로움으로 족했다. 외롭고 가난하지만 할머니에겐 그것이 상만을 위한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 상만이가 이렇게 명절마다 들러주는 건 좋네. 할머니처럼 깜빡깜빡 하지 말고 자주 와."

"아무렴요, 할머니."


상만은 할머니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세월 앞에 풍화되며 몸무게는 가벼워졌을지언정, 그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운정이 어두컴컴한 화장실 불을 키며 중얼거렸다. 핸드폰 배터리를 아예 빼둔 덕에 귀찮은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웠다. 대신 혹시모를 '진짜' 새해 축하는 받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신경안정제와 숙취로 흐려진 퀭한 눈의 텐구를 보았다. 신경안정제건 술이건 둘 중 하나는 올해 아주 끊어버려야 될 성 싶었다. 이왕이면 남들 눈치 덜 보고 마실 수 있는 술이 나으려나? 적어도 신경안정제처럼 숨어서 먹을 건 아니지 않나. 숨어 사는 공황장애 환자보다는 밤길 어느 골목엔가 한명쯤 있는 취객인 편이 나았다. 그 편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그나마 더 자유로웠다. 덕담이란 이름의 잔소리로부터도, 너를 위해 하는 소리라는 핑계로 자신을 옭아매는 온갖 굴레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그들이 사는 현실로부터 동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 역시 술은 끊으면 안돼. 차라리 신경안정제가 낫지. 하며 고민을 끝낸 운정은 연거푸 찬물을 끼얹었다.


 드라이기로 날개를 말리던 사이, 운정의 자취방 구석이 일그러졌다. 체이브리아도스의 신도가 시간의 흐름 저편으로부터 건너오겠다는 신호다. 곧 그 일렁임으로부터 운정의 직장 동료이자 하나뿐인 친구, 체이브리아도스의 트롤인 지연이 도착했다. 운정은 별다른 기색 없이 계속 날개를 말리고 있었다.


"에휴우, 또오 술이야아?"


지연이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운정은 고개만 까딱하곤 마저 날개를 말렸다. 지연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운정 앞에 걸어가 앉았다. 커다란 덩치의 트롤이 앞에 앉자, 운정의 시야엔 지연만이 보였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아직 어두운 감이 있는 자취방에서, 한동안 드라이기 위잉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그렇게 지연이 한참을 느긋하게 기다린 다음에야, 운정은 한숨을 내뱉고선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한숨은 심연만큼 깊었고, 드라이기를 내려놓는다기보단 내던지는 것에 가까웠지만-운정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하나뿐인 친구에게 안겨 억눌러오던 눈물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이렇게 맘 놓고 울 여유조차 없는 일상이었다. 지연은 말없이 투박하고 큼지막하지만, 따뜻한 손으로 운정을 토닥여주었다.




"다녀왔다."


석용이 중환자실 문을 열며 말했다. 이제 곧 퇴원을 앞둔 그의 여동생은 피폐한 표정으로나마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오라비를 반겼다. 제 2 도시에 가해진 루고누 광신도의 타락(corrupt) 테러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고, 석용의 가족 또한 그 중 일부였다. 그나마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진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일거에 전부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라서, 돌연변이 치료소는 으레 장기 입원 환자들로 가득했고, 치료 순번이 돌아오는 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치료비, 그 가증스러운 치료비가 석용의 어깨를 짓눌렀다. 때때로 그는 십일조라는 명목 하에 치료비에 부가세 10%까지 받아가는 진의 신도들을 보면서, 루고누의 신도들 못지 않은 증오를 느꼈다. 제 2 도시 계획을 입안한 대리석당 내각도, 제때 돌입하지 않은 빛나는 자의 경찰특공대도, 교활한 이자율로 돈을 뜯어가는 고자그의 보험설계사도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런 생각은 일이 유독 고된 날이거나 할 때면 반드시 고개를 빳빳이 쳐 들고선, 누가 죄인인지를 성토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되기도 했다.


"엄마아빠랑 다른 오빠들은 잘 계시다. 의사가 말하길 큰오빠는 처음부터 진 신도여서 완치가 빠를 거라네."


석용의 여동생이 방사능에 타버려 빛바랜 보랏빛 비늘과 더듬이, 눈알, 촉수 따위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쳐다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나, 석용은 담담히 먼저 퇴원한 가족들의 근황을 전했다.


"둘째 녀석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학위 따겠다고 난리를 피더라. 아직은 좀 더 휴학을 해야 된다 그래도 끝까지 툴툴거리길래 한 대 쥐어박았다."


석용의 여동생은 슬픈 눈빛으로-원래부터 본인의 것이던 두 눈으로만-석용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아. 그렇게 세게 때리진 않았다. 걱정 마라. 그리고..."


석용이 가방을 뒤적거리자 그의 여동생은 끄르륵 거리는 소리를 냈다. 돌연변이로 어지럽혀진 몸에서 낼 수 있는, 웃음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였다.


"저번에 부탁했던 책들. 우리팀 반장님께 신세 좀 졌다."


주술, 부여술, 발동술, 주문시전술... 석용의 여동생은 다재다능한 만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비록 중환자실에서 나가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했다. 각종 마법 이론서와 교양서를 건네받은 석용의 여동생은 깨륵 거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석용은 여동생이 즐거워하는 모습으로부터 비참함을 느꼈다. 새해 첫날부터. 작년 첫날도 그랬고, 재작년 첫날도 그랬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악몽이었다. 석용의 삶은 악몽이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연휴 되십시오. 업화 철거소 사원 여러분의 새해를 맞이하며.>


"제가 어디 다녀올 곳이 있는 사람이겠어요?"


대법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비며 말했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그의 팀원인 오카와루의 포미시드, 사손이 연신 덕담을 건네고 있었다.


"어쨌든 그래도 반장님도 오늘은 쉬시잖아요! 세상에 어느 직장인이 해돋이를 자기 사무실에서 맞냐고요! 아무리 독신에 워커홀릭이라지만!"

"뭐,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대법은 사무실 창문 너머, 도시를 찬란히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빛에서 온기를 쬐며 기지개를 키는 도시를 보았다. 업화 철거소 건물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내려다보기에는 충분한 높이였다. 새해 첫날에도 도시는 어김없이 움직인다. 누군가의 휴일은 곧 누군가의 출근이었고, 누군가의 휴식은 곧 누군가의 노동이었다. 현대 사회의 도시란 으레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제가 보낸 건 어때요? 설마 해서 사무실로 보내놨더니 진짜 거기 계셨네."


대법은 사손이 보낸 소포에 들어 있던... 싸인된 야구공을 들어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뭔지 도통 감이 안 오는데 말이죠."

"세상에! 그게 뭔지 모르시겠다고요?"


사손은 장장 5분에 걸쳐 그 야구공이 언제 있던 경기의 어느 팀 타자가 몇 번째로 쳐낸 홈런볼...의 레플리카인지 설명했다.


"아, 네. 잘 들었습니다. 열정이 전해지네요."

"하! 그럴 줄 알았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대법은 적당히 맞춰주며 대답해주었다. 핸드폰 너머로부터 사손의 열정 아닌 열정이 느껴지긴 했다.


"그래도, 다음부터 선물을 주실 거라면."


대법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 더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제 1 철거반의 발동장비 교체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수 차례 반려되어 올해로 그 횟수가 두 자리가 된 서류들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발동장비 교체나 도와주셨음 합니다."






"다녀왔어."


어두컴컴한 방 안, 흐릿한 형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커튼 걷은 적 없지?"


또 다른 형체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했어."


처음 들어온 형상이 방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절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퍼 사이로 마법봉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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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로부터 1년 전 새해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이제 입시도 끝났으니까 훨씬 빨리 연재할 수 있을 듯 해요..!


설날맞이 여태까지 쓴 로갤문학 총정리

https://gall.dcinside.com/rlike/25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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